김봉연'야구는 내 인생의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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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준비의 연속”....좋아하는 가수 나훈아 “노래방가면 나훈아 뽕짝 불러”
강의 중 절반은 “인생의 경험이야기“/ 야구 감독에 대한 꿈-언제든 불러주면 간다.

2014년 3월 24일 극동대학교에서 김봉연 교수와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해태 타이거즈 부동의 4번타자, 그리고 프로야구 원년 홈런왕 김봉연!
그의 이야기가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1. 이 인터뷰를 읽을 독자들에게 간단한 인사 부탁드리겠습니다.

- 동아리학생 여려분 안녕하십니까? 사회체육학과 김봉연교수 입니다. 우리 동아리 학생들의 활동을 보고 이렇게 인터뷰에 응하게 되었는데 여러분들이 저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불러만 주시면 달려가겠습니다.



2. 야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언제부터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 우리시대에는 밥 먹고 살기 힘든시기였고 또한 쌀들도 많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자장면의 위력이 컸습니다. 먼저 야구를 시작한 형을 찾으러 간 교무실에서 야구선수들이 먹고 있는 짜장면을 보고 ‘나도 야구를 하면 자장면을 먹을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초등학교 3학년 말에 들어서 4학년때 부터 야구를 시작하였는데 프로야구 은퇴할 때 까지 후보선수를 거치지 않은 것은 대단한 경력이라고 생각합니다.



3. 프로데뷔는 언제하였고, 어떤 각오로 시즌을 맞이했나요?

-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였는데 말로만 프로이지 아마추어리즘 같은 선수들의 자세였습니다. 냉정함보다는 끈기와 팀워크를 강조하였던 시기였습니다. 프로는 돈이 높은 관점을 갖기 때문에 선수들이 생각하는 것과 플레이 하는 것 자체가 달랐습니다. 대학, 실업, 국가대표를 하면서 홈런왕을 놓쳐본 적이 없어서 역시 프로야구 원년에도 놓쳐서는 안된다는 각오로 임했습니다.



4. 1982년 원년 홈런왕을 차지하셨는데 ‘대타홈런’이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당시 상황은?

- 부산에서의 경기 중에 홈 슬라이딩을 하다가 발목 부상을 당해서 경기를 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홈런 개수에서 백인천, 김성한, 김준환 선수들보다 많았었는데 점차 따라오고 있어서 삼미와의 경기에서 주장의 권한으로 김우근 선수보고 나오라고 해서 들어간 타석에서 홈런이 나왔습니다. 몸이 안좋은 상태라서 안타를 쳤다면 뛰지 못하고 아웃이 될 상황이었는데 정말 극적인 만화같은 상황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5. 가슴 아픈 사연의 트레이드마크 ‘콧수염’

- 82년 해태가 6개 구단중 4위를 했지만 홈런왕과 타점왕 타이틀을 가지고 왔습니다. 다음해에 그에 대한 기다가 컸고 김응룡 감독이 부임하면서 전력 보강도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83년에 해태가 전기리그 우승을 하였는데 올스타전 1주일전 하루정도의 여유가 있어서 여수 여행 갔다가 호남선에서 불의의 교통사고 당했습니다. 지금의 얼굴이 314바늘을 꿰매는 대수술을 했었습니다. 야구를 할 수 있다는 판정을 받았을때 10일만에 방망이를 잡았고, 잔디밭에서 15일만에 방망이를 돌려봤고, 20일만에 실내야구장에서 공을 때려보고 한달 만에 퇴원해서 경기에 나갔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엄청난 정신력이라고 생각합니다.



6. 중태 이후에 3일 이후에 깨어났는데?

- 가족에게 유니폼을 가져오라고 했더니 거울을 가져다 주었는데 보니까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때 그래서 ‘교통사고 당했구나’ 라는 생각이 났습니다. 눈만 보이고 얼굴과 온몸이 붕대로 있었으니까 중상을 입었다고 느꼈다.



7. 83년 한국시리즈 MVP를 받은 후에 라면집에 간 사연은?

- 1983년 교통사고 이후에 술과 담배를 끊었다. 야구를 오래 하고 싶어서 몸에 좋지 않는 것을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시리즈에서 19타수 9안타 경이적인 기록을 차지하면서 우승하고 다른 선수들은 헹가레도 치고 나이트 클럽에서 파티도 하고 이벤트를 하고 있었지만 본인은 술을 먹어야 될 것만 같아서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호텔 뒤에 동네 슈퍼에 들어가서 라면을 주문하였는데 주인장이 “오늘의 대한민국 최고의 사나이가 왜 여기에 있느냐”고 물어보았는데 저는 ‘나한테 소중한 한끼다, 만끽하고 있으니 염려말아라’라고 했습니다.



8. 그 당시 연봉 제도는?

- 당연히 있었습니다. 1982년 원년 연봉 책정하는데 김봉연 선수가 과연 프로야구의 기준점이 되야 되는데 어떻게 맞추느냐에 고민이 있었습니다. 김봉연의 연봉은 실업팀의 10배인 2400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받지 못했습니다. 해태는 회사가 작기 때문에 김봉연한테 그만큼 주게 되면 다른 선수들에게 돈을 줄 수 없다는 이유에서 였습니다. 여기서부터 시발점이 잘못되었습니다. 다른 선수들이 원망도 했습니다. 왜냐면은 김봉연이 그만큼 받아야 되는데 못 받으니 그 다른 선수들도 그만큼 많이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연봉에 대해서 불이익을 많이 받았습니다.



9. 그 당시 CF도 찍은 걸로 알고 있는데?

- 1982년 우승도 하고 83년 한국시리즈 MVP도 하고 개인 타이틀 많다 보니 몸값이 뛰게 되었습니다. 소주, 브라보콘, 약 등 여러 가지를 했는데 그 당시 톱 탈랜트들이 최고 500만에 계약을 했었는데 저는 1200만원에 소주CF를 찍었습니다. 운동선수가 탈랜트보다 많이 받고 한 경우는 처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예인들보다 광고 효과가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10. 그당시 응원가가 있었는가?

- 있었는데 유행하게 부를만한 응원하면서 부를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가장 대중적인 ‘목포의 눈물’로 낙점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노래는? - 팝과 재즈를 주로 듣습니다. 우리시절에 맞는 포크송(기타, 송창식, 윤형주)도 듣습니다. 또한 뽕짝창법(특히 나훈아)을 좋아합니다. 지금 노래방에 가도 나훈아 노래를 부릅니다.



11. 현장에 복귀해서 감독에 도전하실 생각이 있나요?

- 2000년에 해태 2군감독을 마지막으로 해태가 부도나면서 기아가 되었는데 구단 관계자들이 김성한 선수를 점찍게 되어서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마추어리즘을 벗어나지 못하다보니 강한 리더십보다는 부드러운 리더십(소통)을 고르게 돼서 김응룡 감독으로부터 ‘프로라는 정신을 이어받지 못했구나’ 라고 슬프게 떠나왔습니다. 그것이 프로야구의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감독제의가 들어온다면?

- 지금도 야구는 항상 머릿속에 있습니다. 광주의 새로운 야구장 개장식에도 다녀왔습니다. 프로야구 감독으로 초대한다면 팀을 가리지 않고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현재감독들이 (후배,선배들이) ‘김봉연이 감독을 못하는것이 아쉽다’ 라고 할 때 저도 안타깝습니다.



12. 예전의 광주 무등 경기장에서 뛰었었는데 이번에 바로 옆에 새로 개장된 챔피언스 필드에 대해서는?

-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좋아졌습니다. 정말 부러울 정도로 잘 지어났습니다. 친환경적인, 친 야구 팬들을 위한 야구장이 되었습니다. 야구장을 보기 위한 팬들이 늘어날 것입니다. 기아가 야구를 잘하면 팬들을 많이 확보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개장식에 참여해서 경기를 하면서 제일 먼저 그라운드를 밟아본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3. 올 시즌 야구 평가?

- 올해는 절대강자였던 삼성이 오승환 선수가 일본으로 가면서 평준화가 되었습니다. 또한 NC가 지난시즌 꼴지의 예상을 뒤엎고 7위를 한 것이 프로야구 반전할 수 있는 기회라고 봅니다. 내년에 KT가 1군에 합류하면서 10개구단이 운영됩니다. 절대강자가 없는 혼전이 예상됩니다. 시범경기서부터 의외의 순위가 만들어 졌습니다. 본경기가 시작되면 혼전이 예상됩니다.



14. 음성군 야구 협회장?

- 극동대학교 앞 감곡면에 야구장이 들어섭니다. 야구장 활성화 되려면 야구팀이 생겨야 되는데 인프라 구축을 위해서 연합회 회장을 맡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야구팀을 만들어야 겠다는 구상으로 협회장 수락하게 되었습니다.



야구하면서 번트 대본적이 있는지?

- 1982년부터 1988년 은퇴할 때까지 7년동안 딱 한번 해봤습니다. MBC청룡과의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무사 1.2루 성공했는데 야유가 심했습니다. 왜냐면 4번타자한테 번트를 지시했기 때문입니다. 팬들이 김응룡한테 많은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다음에 번트 기회가 있는데 벤치에서 치라는 사인이 나와서 치니까 홈런이 나왔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번트란 없었습니다.



인생을 야구에 비유할 수 있나요?

- 사람한테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성과가 얻어지는 것입니다. 우선 자기가 하는일에 철저하게 프로정신을 가지려면 다른 사람보다 앞서가야 됩니다. 누구나 1위를 할 수는 없습니다. 경쟁자를 이기려면 최선을 다해야 됩니다.



귀농했는데 복숭아 농사는 잘 되는지?

- 극동대 교수로 오면서 아들딸 시집,장가 가고 농사도 지을 겸, 또한 학교 교수 생활 하는데 있어서 원만하게 진행하기 위해서 학교 앞으로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복숭아 농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농사를 하다보니 야구는 자기가 가진 힘의 100프로 이상 발휘하는데 농사는 15-20프로의 힘밖에 발휘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따로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2년 전에 복숭아밭을 정리했습니다.



타이거즈의 레전드로서 최근의 기아의 부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 안타깝습니다. 해태하면 용맹스러운 팀 이미지인데 즉, 호랑이 같은 용맹이 아니고 경기에서 이기려는 것입니다. 2009년 우승이후 선동렬 오면서 야구가 작아졌습니다. 한점을 내기 위한 작전을 보면서 옛날 해태야구를 보던 팬들은 재미가 없어졌다고 할 것입니다. 통이 큰 야구를 해야 됩니다.



콧수염과 성적과의 상관관계

- 개인적으로 곤혹스러웠습니다. 기르고 싶었던 것이 아니고 면도를 하다가 덧이 나서 운동장을 못나갈 정도로 독이 올라서 기르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방망이가 맞지 않아서 84~85년에 슬럼프가 왔습니다. 또한 탈모도 생겼고, 병살타왕등 좋지 못한 기록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야구를 이렇게 마무리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85년도 시즌 끝나고 면도를 하고 86년도 공심타법을 하게 되었습니다. 즉 ‘홈런을 안치고 안타만 친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결과 홈런, 타점, 장타력 3관왕을 했습니다. “욕심이 앞서가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2부 교수 김봉연

15. 어떤 인연으로 극동대학교에 오게 되었나?

- 2000년도에 11월에 해태 계약 끝나고 우연히 식사자리에서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제가 책 읽는 선수로 알려져 있어서 논문도 작성하고 학위도 취득했습니다. 박사학위 들어가기 전에 코치생활하면서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강의 해보라는 친구의 권유가 지금까지도 하고 있습니다.



16. 첫 수업 학교 강의 때?

- 교양 체육과목인데 수강인원이 67명이었는데 첫 수업을 위해 3개월간 공부했습니다. 첫시간에 이름을 한문으로 썼는데 아무도 몰라서 순간적으로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이승엽선수는 아느냐라는 질문에 다 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승엽 선수 보다 야구를 더 잘 했다고 하자 안믿는 분위기 였습니다. 그래서 부모님들한테 물어보라니까 다음 수업시간에사인을 많이 해주었습니다. 겸임교수 하다가 교수가 되고 학생들도 점차 알아봤습니다.



17. 어떤 과목과 직책을 맡고 있나요?

- 골프, 운동과 건강, 테니스, 농구등을 했고, 야구는 할만한 장소가 없어서 못하고 있습니다. 홍보실장 학생처장, 홍보센터장등 학교일을 우선적으로 합니다. 지금까지 앞만 보고 왔습니다.



18. 야구와 골프의 차이점? 공통점?

- 공통된 것은 하나인데 임팩트 순간입니다. 이론이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때리는 순서가 다르다는것이 차이점입니다. 하지만 두 개를 비교하면 안됩니다. 야구는 10번 중에 3번만 잘 치면 되는데 골프는 10번중 10번 잘 처도 스타가 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골프가 어렵다는 사람은 운동에 소질이 없는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19. 총장직에 욕심?

- 거기까지는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여러 직책을 맡았지만 학교발전을 위해 어떻게 헌신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습니다.



20. 교수직을 하면서 이루고 싶은 것은?

-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서 필요한 인재가 될것인가? 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강의중 절반을 인생에 대한 이야기 합니다. 충분히 공감갈 수 있는 경험적 이야기 해줍니다.



21. 김봉연에게 야구란?

- ‘인생의 전부’가 아닌가 싶습니다. 후배 선수들이나 제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뭐든지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한테 기회가 많이 온다는 점입니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 삼선, 사선까지도 생각해 놓아야 됩니다. 선수들이 막연하게 제일 잘하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준비 되려면 노력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22. 김봉연에게 극동대학교란?

- 내 인생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준 학교입니다. 야구를 하면서 영어, 한문, 세계사, 한국사가 미리 준비가 되어서 인연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극동대학교에 다시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 모든 인터뷰를 끝낸 김봉연 교수는 옛 추억에 잠시 잠긴듯 환한 미소를 보이며 자리를 떠났다. 왕년의 대스타의 인터뷰를 한다는 자체가 큰 영광이었다.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 시간이었다.



취재: 노윤창, 양희만(profilecard@naver.com), 이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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